
공간별 주거환경 디자인 방법
지난 글(치매를 돕는 주거환경 디자인: 10가지 원칙)에서는 치매 환자를 위한 주거환경의 핵심 원칙 10가지를 살펴봤다. 이번 글에서는 실제 집 안의 공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치매를 겪는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환경 변화도 새로운 스트레스나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요소를 바꿀 때는, 이전의 기억과 경험을 최대한 존중하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균형 감각, 주의 집중력, 시력, 청력 등이 자연스럽게 약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 소개할 주거환경 아이디어는 고령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든 걸 한 번에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실생활에 맞게 일부 요소만 적용해도 충분히 긍정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실천 가능한 부분부터 천천히 시작해보면 좋겠다.
거실
안전한 통로 확보
바닥에 물건이 흩어져 있으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치매 환자에게는 더 위험하다. 걸을 수 있는 길을 확보하면 움직이려는 의지가 생긴다. 이는 자율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다. 바닥 재질도 중요하다. 미끄러운 재질은 넘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에, 미끄럼 방지 매트나 카펫을 활용해 미리 대비한다. 가구 사이의 간격도 확인한다. 여유가 있다면 1.2미터 이상, 최소한 1미터 정도의 통로를 확보해야 안전하다. 이동 경로는 단순할수록 혼란이 줄어든다. 돌아가는 동선이나 복잡한 가구 배치는 피하고, 직선에 가까운 경로로 유도한다. 길이 뚜렷하게 보이면 방향을 잃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기 쉬워진다.
명확한 대비
공간의 경계를 눈으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바닥과 소파, 통로와 가구 사이에 색상 차이를 두면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명확한 대비는 색상의 채도보다는 밝기(명도) 차이를 활용하는 게 좋다. 강한 원색보다 눈에 부담을 주지 않는 중간톤을 사용하고, 색상 수는 줄인다. 벽과 바닥의 구분도 신경 쓴다. 걸음을 내디딜 때 어디가 경계인지 분명하면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 특히 환각이나 착시가 잦은 경우, 복잡한 무늬나 얼룩덜룩한 바닥 패턴은 피하는 게 바람직하다.
친숙한 요소
익숙한 물건은 정서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가족사진, 예전에 쓰던 쿠션, 오래된 장식품처럼 기억에 남은 물건은 공간에 친밀감을 더한다. 이런 요소들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정체성을 회복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건 내 거야”라는 감각은 환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면 물건이 너무 많으면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불필요한 장식은 줄이고, 꼭 필요한 것만 눈에 띄는 위치에 배치한다. 선택할 것이 적을수록 집중은 쉬워지고, 결정도 단순해진다.
조명
조명은 공간의 분위기와 안전을 동시에 좌우한다. 거실 전체에 골고루 퍼지는 빛이 좋다. 밝되 눈이 부시지 않아야 한다. 그림자가 짙게 생기면 물체의 경계가 왜곡돼 착각이 생기기 쉬우므로 조심한다. 가능하다면 자연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낮 동안 햇빛이 잘 들어오면 생체 리듬이 안정되고, 공간도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주방
활동 기회 갖기
주방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다. 작은 집안일이라도 직접 해볼 수 있다면, 치매 환자에게 의미 있는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한 조리나 설거지처럼 위험이 적은 활동부터 시작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감각은 자존감과 활력을 높여준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자립적인 행동을 이어가는 경험 자체가 중요하다. 야채를 씻거나, 좋아했던 요리를 함께 준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향을 맡고, 재료의 색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각 자극이 된다.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을 떠올리면 감정적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안전한 활동을 위한 준비
하이라이트나 가스레인지 보다는 인덕션처럼 화재 위험이 적은 조리 기구를 사용한다. 가스레인지에는 차단기를 설치하고, 주변엔 물건을 쌓아두지 않는다. 조리도구 중 날카로운 것들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둬야 한다. 연기나 냄새는 과도하면 자극이 될 수 있다. 주방엔 환기가 잘되도록 창문이나 환풍기를 점검해둔다.
보이는 수납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보이면 혼란이 줄어든다. 투명한 문이 달린 장이나 오픈 선반을 사용하면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식기나 양념통에는 라벨을 붙여 시각적 단서를 제공한다. 서랍은 너무 복잡하지 않게 칸막이를 이용해 구획을 나눈다. 물건마다 자리를 정해두면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익숙한 사용감
새로운 기기는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다. 가능하면 기존에 쓰던 수도꼭지나 가전제품을 그대로 유지한다. 버튼이 많거나 터치패널처럼 복잡한 조작은 피하고,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식의 제품을 선택한다. 익숙한 냄비나 컵을 계속 사용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손에 익은 물건은 기억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고, 다시 배우는 부담도 줄어든다.
식당
테이블 세팅
접시와 테이블 매트의 색이 다르면 음식이 더 잘 보인다. 이런 시각적 구분은 식사할 때 인지 부담을 줄여준다.
음식이 또렷하게 보이면 식욕을 자극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매트는 단색이나 무늬가 단순한 것이 좋다. 복잡한 패턴은 집중을 흐릴 수 있다. 이런 세팅은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다. 치매 환자가 스스로 식사할 수 있도록 잔존 능력을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
불필요한 자극은 줄인다. TV 소리나 시끄러운 음악은 되도록 꺼두고, 대신 식탁 위에 작은 화분이나 사진 한 장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든다. 조명은 밝고 고르게 퍼져야 한다. 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시거나, 너무 어두워서 물건이 잘 안 보이면 식사에 방해가 된다. 식사를 할 때 음식뿐 아니라 주변 환경이 잘 보여야 실수도 줄고, 식사량도 늘어난다. 안정된 분위기 안에서 식사는 훨씬 수월해진다.
자율성 존중
작은 선택도 스스로 하게 하면 의욕이 생긴다. 예를 들어, 식기나 수저를 직접 고르게 하거나 식탁 정리를 부탁하는 식이다. “내가 선택했다”는 감각은 일상의 역할을 회복하게 만든다.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늘은 국이 좋으세요, 찌개가 좋으세요?”처럼 선택지를 주면 판단과 결정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뇌는 자극을 받고, 인지 기능도 자연스럽게 유지된다.
침실
어두워야 할 때는 어둡게
밤에는 암막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이용해 빛을 확실히 차단한다. 숙면은 치매 환자의 컨디션과 안정에 큰 영향을 준다. 낮과 밤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환경을 만들면 생체 리듬이 더 안정된다. 잠이 부족하면 인지 기능이 떨어지고, 낮 동안 졸림이 심해져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조용하고 어두운 밤은 단순한 편안함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명확한 길 안내
화장실이나 복도로 통하는 문은 눈에 띄게 표시한다. 문 색을 다르게 칠하거나 간단한 안내판을 달아두면 밤에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낯선 환경에서 방향을 잃는 불안감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주요 동선에 센서등을 설치하면 야간 이동이 훨씬 안전하다. 가구 배치는 단순하게, 동선은 넓게 유지한다. 화장실에 가거나 물을 마시러 갈 때 장애물이 없도록 바닥을 정돈해둔다.
거울
거울을 보고 스스로를 알아보지 못해 불안해하는 경우가 있다. 불필요한 거울은 치우고, 사용하지 않을 땐 덮어두는 게 낫다. 특히 밤이나 어두운 환경에서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낮에만 일정 시간 사용하도록 하고, 평소에는 커튼이나 천으로 가려두는 것도 방법이다. 혼란을 줄이는 게 우선이다.
욕실
안전 손잡이 설치
샤워실과 변기 주변엔 손잡이를 설치한다. 손잡이는 벽과 색을 다르게 해서 눈에 잘 띄게 한다. 이렇게 하면 넘어질 위험을 줄이고, 움직일 때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재질도 중요하다. 미끄럽지 않고 손에 닿았을 때 차갑지 않은 소재가 좋다. 세면대 옆에도 손잡이가 있으면 양치나 세수할 때 몸의 균형을 잡기 쉽다. 치매 환자는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이나 방향 감각의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그래서 어디서든 ‘잡을 곳’이 있다는 건 안전 사고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끄럼 방지
바닥엔 미끄럼 방지 타일이나 매트를 깐다. 물이 고이지 않게 자주 확인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문 앞에는 물기를 빨리 흡수하는 발매트를 놓는다. 샤워 부스 안 배수 상태도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바닥 색은 밝고 단순한 게 좋다. 그래야 물이 고였는지, 비누 거품이 남아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패턴이 복잡하면 바닥 상태를 알아채기 어렵다. 시각적 단순함이 곧 안전이다.
물 온도
온수 설정 온도는 너무 높지 않게 조절해둔다. 뜨거운 물로 인한 화상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온도를 미리 조정해두면, 혼자 씻을 때도 더 안전하다. 작은 설정 하나가 사고를 막아준다.
정원
안전한 산책로
실외도 실내만큼 넘어짐을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 잡초는 제때 뽑아두고, 바닥은 평탄하게 정리한다. 데크를 설치하거나 걷기 편한 길을 만들면, 치매 환자도 혼자 산책하기 수월해진다. 계단이 있다면 난간을 설치한다. 단, 너무 인공적인 느낌은 피하고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한다. 야간엔 약한 조명을 켜두면 밤에도 부담 없이 정원을 다닐 수 있다. 산책 범위가 넓어지면 생활 반경도 함께 넓어진다.
감각 자극 활용
허브, 꽃, 새 모이통, 분수 같은 요소를 정원에 적절히 배치한다. 자연스럽게 오감이 자극되면 기분도 안정되고 집중력도 향상된다. 허브는 향이 세지 않고,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는 것으로도 감각 자극이 된다. 계절마다 꽃이 바뀌는 정원이라면 자연의 흐름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꽃이 피었네”, “이만큼 자랐구나” 같은 작은 관심이 인지 자극이 된다.
폐쇄감 줄이기
너무 높은 울타리는 ‘막힌 느낌’을 줄 수 있다. 대신 덩굴식물이나 반투명한 펜스, 낮은 담장을 활용해 개방감을 살린다. 울타리는 주변 식물과 어울리게 만들고, 색감도 부드럽게 조정한다. 공간을 막는 게 아니라 둘러주는 느낌으로 설계하면 심리적 안정감이 커진다. 폐쇄감은 눈에 보이는 높이와 재질에서 시작된다. 작은 차이가 공간을 전혀 다르게 느끼게 만든다.
활동 기회
정원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생각보다 많다. 작은 텃밭을 가꾸거나 식물을 돌보는 일에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수확한 채소나 허브를 식탁에 올리면, 일상 속 경험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새 모이통을 달아두거나 작은 연못, 분수를 두는 것도 좋다. 생명 있는 것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경험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자극은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돌보는 분들이 기억하면 좋은 점
치매 환자의 잔존 능력 살리기
무엇이든 스스로 해볼 수 있도록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경험 자체가 자존감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몸이 불편하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안전이 확보된 상태라면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응원하는 게 중요하다. 잔존 능력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조금씩 끌어올리는 것이 돌봄의 핵심이다. 모든 걸 대신해주는 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행을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선택과 결정 기회 주기
작은 일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돕는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간식을 먹을지 직접 고르게 한다. ‘내가 결정했다’는 감각은 자율성과 연결된다. 식사 메뉴, 활동 순서 같은 일도 함께 의논하면서 의견을 존중하면, 환자가 스스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작은 결정권이 일상 속 자립을 지켜주는 토대가 된다.
과도한 자극 vs. 유익한 자극
소음, 강한 냄새, 복잡한 무늬는 혼란을 부른다. 반대로 차분한 음악, 식물 향, 부드러운 조명은 안정감을 준다. 간단한 악기 소리나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좋다. 특히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공감각 활동—무언가를 만지고, 냄새 맡고, 소리를 듣는 경험—은 뇌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런 자극은 치매의 진행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참여와 휴식의 균형
누구든 혼자만 있고 싶을 때가 있고, 함께 있고 싶은 때도 있다. 치매 환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 혼자 쉬는 시간 둘 다 필요하다. 하루 일정에는 반드시 휴식이 포함되어야 하고, 지나치게 많은 활동은 피로와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반면,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으면 우울감과 무기력이 깊어진다. 가벼운 취미 모임이나 친인척과의 만남처럼 사회와 이어지는 작은 접점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안전 확인 습관화
욕실 미끄럼 방지, 가스 차단기, 화재 감지기 같은 장치는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치매 환자는 위급 상황에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려우므로 사전에 준비된 안전 장비가 큰 차이를 만든다.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보조 기기가 필요할 수 있다. 긴급 호출 버튼, GPS 기능이 있는 기기는 “문제가 생겨도 바로 도와줄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가족에게도, 환자에게도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치매 환자를 위한 주거환경 디자인은 사고를 줄이고 자립을 돕는 데 초점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환자의 잔존 능력을 지켜주고 스스로 움직이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AaRC(아크)는 치매 환자와 가족이 조금 더 나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실천 가능한 디자인 방법을 제안한다. 지금 당장 큰 걸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제안한 작은 변화 하나가 치매를 겪는 사람과 그 가족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글쓴이 | 이원호 (AaRC | 대표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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